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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사 9:6-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기쁘게 인사를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 God with Us, 하신 주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원하기는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가슴깊이 새기는 특별한 성탄절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소련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이요, 한 초등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열광하는 어린이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그가 교단 위에 올라서서 엄숙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지구 밖을 다녀왔고, 지구 밖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며 우주인으로 되게 한 조국에 감사하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베들레헴 말구유에 탄생하여 결국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 죽은 예수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우주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예수가 있는 곳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님과 예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위에는 태양과 달만 있었고 아래는 아름다운 지구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천국과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 말에 아이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박수 소리가 멎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 작은 어린아이가 일어나 “가가린 동무, 그 하나님과 그 천국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후로부터 지금까지 나의 마음속에 나와 같이 있습니다. 가가린 동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가가린 동무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난 그 천국과 예수가 나에게 있기에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고 이 교실 안에서도 예수를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우리 자신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생과 사를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00년 전에 예언한 말씀으로, BC 759년에 이사야가 기록한 예언의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기는 온 세계를 다스리고, 인간들을 위해 고난을 그 어깨에 걸머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인데 먼저 6절을 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안 그래요? 한 아기가 태어나는데, 이 아기의 어깨에 정사를 메고 있다고 합니다. 정사가 무엇이에요?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태어나는 이 아기가 우주를 통치하고 세계사와 민족사와 역사를 주관할 힘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바꿔 말하면 개인과 민족들의 운명이 이 아기에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세계를 통치하고 모든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짊어지신 분이 막중한 책임과 권세를 가지고, 가장 나약하고, 유약한 아기로 오신 것입니다. 태어나실 방도 없어서 베들레헴의 한 구유 안에서 자신의 거처를 삼았고, 그것도 너무나 초라하게 탄생하신 것 아닙니까? 이렇게 탄생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오늘 본문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나누면서 오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기묘자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기묘자라는 의미는 ‘놀랍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Wonderful’로 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이 아기의 이름이 아주 ‘놀랍다’라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왜? 놀라운 것일까요? 이 만큼 더 설명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놀랍다’라는 단어 외에는 다른 단어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놀랍다’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놀랍다가 되게 한 것일까요? 탄생부터 놀라운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남자도 모르는 처녀가 성령님을 통해, 즉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탄생하셨는데, 이 사실이 놀라운 것입니다. 믿기지 않는 내용 아닙니까? 이것을 상식적으로 믿으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상식은 아기의 탄생은 남녀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전혀 관계가 없는 처녀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지혜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안 그래요? 그래서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납득이 가지 않아 거짓된 사실을 날조했다고, 이성과 논리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신화라고 까지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죄 사함까지 하십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은 예수님에게 어떤 한 여인이 들어와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은 채 다 부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네 사함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때 같이 있었던 바리새인들, 즉 종교 당국자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눅 7:49절에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눅 7:49)고 반응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떻고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다들 놀랍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막 1:22절에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 일러라”(막 1:22)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요? 모든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한 죽음 아닙니까? 무슨 이야기이에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입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많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한 몸을 보여주셨는데, 여러분, 상식의 답은 죽음은 그냥 죽음 아닙니까? 안 그래요? 죽은 자는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권세들을 이기시고, 무덤 속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당신께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성탄감사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예배를 받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모사라고 하였습니다. ‘모사’라는 말의 의미는 ‘상담자’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Counselor’이에요. 요즘에야 이 단어가 익숙하지만 성경을 한글말로 번역할 당시에는 이 ‘상담’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아 ‘지혜를 가지고 문제를 풀어 주는 놀라운 분이라는 의미’로 이 ‘모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여하튼 우리 주님이 상담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상담일까요? 바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에 관한 진정한 해답을 알고 계시기에 우리를 위해서 친절한 상담자가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어요. 히 4:15절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신다는 이야기이고, 우리의 눈물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독과 아픔과 불안과 절망을 아신다는 것, 그래서 이 상담자가 되신 주님이 우리 곁에 오셔서 함께 그 고통을 겪고, 눈물을 흘리며, 위로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찬양이 있어요. “예수 산을 옮기시는 내 주는 능력의 주” 무엇이에요? 이 성탄절에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은 평범한 아기가 아니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누구입니까?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입니다. 골로새서 1장 15-17절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로새서 1:15-17)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아기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엄청난 역설은 갈릴리의 베들레헴의 초라한 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것으로 시작되었고, 어느 특정인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만나도록 하셨다는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지난주에 나눴듯이 고넬료 주님을 만나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요 1:18)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정말 인간의 지혜와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 친히 세상에 제시한 자신인데, 이것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모두 다 예수님에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안 그래요? 자신을 제시한 그 당시, 그러니까 BC 6년은 살기에 척박한 때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인 헤롯이요, 유혈 음모와 로마의 정치 후원으로 이스라엘을 장악했고, 유대인의 행세를 하며 지냈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끔찍한 압제의 시기였습니다. 그때, 유대 산골의 엘리사벳이 첫 아이를 잉태하지 않았습니까? 가임기를 훌쩍 넘겨 폐경까지 겪은 여인에게 일어난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이 잉태된 아이가 아주 특별한 목적, 무엇이에요? 그러니까 메시아의 선구자가 될 사람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가 안 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가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절망의 이중적 상징인 엘리사벳의 불임과 노령은 하나님께서 불가능이 없음을 알리는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분,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려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친히 오셨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아기가 아닙니다. 본질에 있어서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이 분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여러분을 도우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영어로 ‘Everlasting Father‘인데, 이것은 ‘언제나 변함없이 자기 백성에게 아버지같이 대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다른 표현으로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 하신다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그 분과 함께하면 세상이 두렵지 않고요, 사람들이 두렵지 않고 실패가 두렵지 않는 것 아닙니까? 이 영존하신 하나님이 넓은 들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남자 오천 명과 그 가족들이 산비탈에 그룹을 지으며 모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빌립에게 이런 말을 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 이 질문은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신 질문 아닙니까? 사실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고 약속 없이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이것을 잘 이해 못한 빌립이 사람의 수와 그에 드는 빵 값을 계산하지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몇 십 배의 풍요로 그 많은 사람들을 돌리신 영존하신 아버지이신 예수님입니다. 왜? 입니까? 덧셈이 아니라 곱셈으로 답하시는 영존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기에 주님이 마 6장 26절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고 하셨던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며 우리를 기르고 돌보시는 놀라운 그분,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평강의 왕입니다. 누가는요, 누가복음 2장 14절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그날 밤에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노래하며 외친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누가 평화를 경험하느냐?’입니다. 이 평화는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은 전력투구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 형 안에는 자수성가하고, 생활력이 강하고, 혁명가, 경쟁의식이 강한 사람, 실력자라를 결과물을 담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나타난 공통점은 분노와, 우울과, 좌절, 불만, 탐욕, 권력욕, 혼란의 감정들을 바견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분들도 있지만 로버트 와이즈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다분하게 생산적인 활동을 만들지만 ‘뒤집히는 속’을 양성한다‘라고. 왜? 그러냐면 아무리 에너지를 쏟아 부어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것의 반대가 무엇이에요? 바로 안식입니다. 안식은요, 들음과 믿음을 포함시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공급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은 곧 평안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요란하잖아요? 요란한 세상이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평안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은 이 평화를 전혀 알지 못하고, 맛볼 수 없지만 예수를 영접한 사람만이 누리는 평안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요 14:1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라고 하셨습니다. 이 평안을 주시려고 주님이 오셨고, 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늘의 평안을 주시려고 싸우려는 총을 내려놓게 만들고 다툼의 벽을 사랑으로 바꿔버리려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마귀의 세력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을 보게 하시려고 태어나셨습니다. ‘Prince of Peace’, 이것은 내면에 진정한 평안과 기쁨의 충만입니다. 즉 우리를 평화로 다스리신다는 뜻, 불안한 장래와 무한경쟁 사회 속에 살고 있지만 평강의 왕으로 말미암아 참 평안을 누리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나라가 영원무궁하다고 7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세상 나라는 흥망성쇠하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다는 것, 쉽게 말하면 로마도 멸망했고, 언젠가는 이 강대한 미국도 결국 망한다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주님이 다스리는 그 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 아기로 오시면서 시작된 이 나라는 영광의 왕으로 다시 오실 때 완성된다는 말씀, 우리를 평화로 다스리고 평안을 주시는 놀라운 그분의 이름은 평강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한 아기를 주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은 700년 후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빌어 한 아기로 탄생하사 성취되었습니다. 이 한 아기 예수님으로 흑암에 있던 우리가 큰 빛을 보게 되었고,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던 죄와 사망의 멍에를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꺾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기묘자라 모사요 전능한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인생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우리를 돌보시며 평강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는데, 여러분, 만약에 한 아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의 존재로 있게 되었을까요? 아직도 고통과 멸시를 받으며 흑암 속에 행하고 있을 것입니다.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로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 은혜를 주시려고 오셨고, 우리가 누리는 이 구원과 축복이 한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사람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한 아기의 이름이 무엇이라고요?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시라는 이 사실을 굳게 붙잡고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이번 성탄도 세상을 이길 수 있고 평안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며 감사하며 전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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