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막을 수 없다”
(사도행전 13장 44~52절)
여러분, 세상에는 아무리 막아도 막히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봄이 되면 땅에서 올라오는 새싹이라든가, 말라버린 것처럼 보인 나무에서 나오는 잎이라든가, 터지기 시작한 웃음이라든가,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음을 경험해 본분만이 압니다. 그리고 한 번 붙은 소문은 엄청나게 빠른 발을 가지고 있어요? 아무리 “그 얘기는 하지 마.” “그 이름은 꺼내지도 마.” “그 말은 퍼뜨리지도 마.”라고 해도 오히려 더 빨리, 더 멀리 퍼집니다. 최근 한국에 남포교회 원로 목사님이신 박영선 목사님의 이야기가 뜨거운 감자죠? 사실이 아닌 것들로 너무 부풀어져 많은 이들이 곤혹을 받고 있습니다. 아들 교회 개척하는데 40억을 박 목사님이 요구하였다는 이야기가 한국 교계 이슈입니다. 때는 이때라고 목사들이 흔들고, 교인들이 흔들고 사탄이 흔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들도 이 일을 시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요? 질투로, 비방으로, 권력으로, 심지어 때려 도시에서 내쫓았지만, 결과는 정반대,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입에서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움직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막을 수 없다.”입니다.
오늘 누가 말씀을 막으려 했는지, 왜 막으려 했는지,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더 멀리, 더 깊이 전파되었는지를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나눴던 것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바울이 설교를 마치자,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바울의 설교를 더 듣기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안식일에도 와서 설교해달라는 요청이었죠? 기억나시죠? 그리고 난 후, 바울과 바나바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그들 중 다수가 실제로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안식일이 되었어요? 온 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고 오늘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44절을 볼까요? “그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기적을 보기 위해서, 정치적 선동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온 시민까지 모였습니다. 말씀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어요? 광고도, 회당 장이 조직적으로 동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요? 한 주 동안 도시 전체에 스며들었던 결과이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갈증이 그 도시 ‘거의 다’ 모이게 하였습니다. 처음, 회당에 모인 그들이 말씀을 듣고 집에 돌아간 후에도, 말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 식탁에서나, 일터에서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들은 그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라고, 그래서 “이번 주에 꼭 다시 가야겠어.” “지난주에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들었거든? 그런데 너무나 은혜를 받았어? 당신도 한번 들어봐. 이번 주에 같이 가지 않을래?” “이건 예전에 들었던 설교가 아니야? 엄청나?”라고 하였으리라 추론해 봅니다. 결과가 엄청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동안 예배에 소극적이던 이들도 왔을 것이고, 말씀에 무관심하던 이들도 왔을 것이고, 세상일에 너무 바빠 예배도 제대로 참석하지 못했던 이들도 왔을 것이고, 심지어 성도 때문에 상처받은 이들까지도 ‘듣고 싶어서’ 왔을 것이고, 유대인만이 아니라 헬라 인까지, 말씀이 만들어 낸 갈망의 결과가 되었습니다. 부흥의 현장에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오늘은 하나님 말씀이 너무 듣고 싶다.” “다른 일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꼭 그 자리에 있어야겠다.”라는 결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죠? 도시가 변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확장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몇몇 경건한 사람만이 아니라, 도시의 일상과 관심을 붙들고 있던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순위에 두게 되었습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우리 사랑의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어지는, 참된 부흥이 임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아멘.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45절입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몇몇 유대인들이 시기와 분노가 가득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반박하고 비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왜? 일까요? 이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기에 자존심을 움켜쥐고 반박하였습니다. 말씀 거부가 아니에요? 자기중심을 내려놓지 못한 모습것이고, 논리로 이기지 못하니까 인격 공격까지 하였습니다.
이 반응은요?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도 선지자들이 말씀을 선포했을 때, 들은 사람도 있고 거부한 사람도 있었듯이 복음을 받아들이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해하지 못하고 빈정대며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 모습이 과거나 지금이나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회당에 모였다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 아닙니까? 말씀을 전해준 바울과 바나바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지만,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 무리를 보고”입니다. 즉 많은 사람 때문에 유치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누가? 유대인들이, 그동안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를 도맡아 온 유대교 지도자들과 추종자들이 시기하고 질투하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설교할 때는 이 정도의 인파가 몰려든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바울의 딱 한 번 설교로 다시 듣겠다고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시기심에 사로잡혀 권위와 자존심에 큰 손상을 입었다고, 아니 위기감을 느껴 시기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요? 살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누군가를 시기해 본 적이 있었죠? 이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아 나는 시기 같은 것, 전혀 몰라?” 거짓말입니다. 언제나 자기와 가까운 사람, 특히 자기가 속해 있는 같은 분야의 사람이 시기와 질투의 대상입니다. ‘경쟁자’라는 이 단어가 영어로 ‘라이벌’이죠? 이 말은 River, 강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같은 동네에서 같은 강물을 마시며 사는 사람끼리 서로 경쟁자가 된다는 것이에요. 다른 동네에서 다른 강물을 마시는 사람과 나와는 별 상관이 없어서 경쟁하거나 시기할 이유가 없어요? 같은 동네, 같은 강가에 살면서 강은 강물을 마시는 사람,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끼리 경쟁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릇된 경쟁심이 시기로 나타나 교인은 교인을 시기하고, 목사는 목사를 시기하고, 선교사는 선교사를 시기하고, 교회는 교회를 시기하고 이런 모습이 나타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바울의 말을요? 유대교 지도자들이 비방, ‘abuse’를 했습니다. 45절을 다시봐요?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반박과 비방은요? 좋은 표현입니다. 원래 의미는 굉장히 심한 말과 모욕적인 말, 심지어 욕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복음의 빛이 이방인에게로 옮겨짐을 바울과 바나바가 선포하죠? 46절을 보세요?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복음을 맡기셨고 반응해야 할 책임까지 주었는데도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몰라서 거절한 것이 아니라, 알고도 버렸고, 그것도 의도적이고 반복적 거절함으로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라고, “너희가 스스로 그렇게 선택했다”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생명이고, 거절하면 그 선택의 책임이 본인에게 돌아오는데, 이제 너희가 거절했으니 다른 사람을 향해, 왜 이방인에게로 가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주어졌고 말씀을 들었어도 거부하는 사람들이나 영생을 얻음에, 합당하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하면요? 복음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으면요? 하나님은 그 말씀이 다른 사람에게로 가게 하십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사야 49장 6절을 인용하여 전합니다.
그것이 바로 47절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 목적, 어떤 목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 “이방의 빛”입니다.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하는 도구라고 설명하니까, 이에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의 하나가 이방인들의 반응이고 다른 하나가 유대인들의 반응입니다. 첫째로 이방인들의 반응을 봅니다. 48~49절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방인들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찬양했다고, 그리고 영생을 얻도록 정하신 사람은 다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반응,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믿더라”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즉 어떤 사람은 선택되고, 어떤 사람은 버려졌다는 말씀이 아니라, 유대인들 스스로 복음을 거절한 모습, “너희가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했다” 스스로 복음을 밀어냈는데, 어떤 사람은 은혜로 복음을 받아들였기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믿더라”가 되었다고 그들의 믿음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말합니다.
인간의 결심에서 나온 믿음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된 믿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에요? 그들이 더 똑똑해서, 그들이 더 선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죠?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이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구원의 선물을 받은 사람은요? 구원받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받기로 지명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하죠?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바울의 이야기가 이 이야기입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이 아니구나.’라고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이구나.’라는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말씀을 기뻐하면서 받아들이는 이들을 보묘 ‘아, 이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사람들이구나.’ 하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둘째는 유대인들의 반응입니다. 50절,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비시디아 안디옥의 권력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고 쫓아냈습니다. 아마도 말씀을 전한 다음에요? 비시디아 안디옥을 바로 떠난 것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비시디아 안디옥 전역에 두루 퍼져 나가니까, 유대교 지도자 그룹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박해하고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박해’라는 이 단어 안에는요? ‘몸에 해를 가한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때리고 고문을 했어요?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이 성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던 목적을 이루었다는 것이고 쫓겨나는 바울 일행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척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고 누구보다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죠? 그러한 그들의 거부에 대한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이 51절입니다.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예수님이 가르침대로 발의 먼지를 떨고, 상대와 더 이상 관계가 없다거나 혹은 상대의 잘못은 자신과는 무관함을 나타내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반대와 비방과 박해가 오히려 복음이 다른 곳으로 전파되게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52절로요? 오늘 본문은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의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이에요? 환영이 아닌 시기와 반대, 박해와 추방을 경험한 직후의 상황이었습니다. 얻어맞았던 상황이고, 마음이 몹시 무거운 상황처럼 보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제자들은 낙심하였다”가 아니라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라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이 기쁨은 형편이 좋아져서 생긴 기쁨도, 문제가 해결되어서 생긴 기쁨도 아니기에, 말씀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기쁨이기에 그렇습니다. 비록 내쫓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내쫓기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기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이 막히지 않았다는 이 사실의 기쁨이고요? 말씀은 계속 퍼져 나간다는 이 사실의 기쁨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였다? 문제가 사라졌다, 두려움이 없어졌다가 아니라, 비록 두려움이 있어도 맡긴 사명을 놓지 않는 힘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사도행전 13장의 마지막 장면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복음은 거절당했고, 사울과 바울은 쫓겨났고, 성읍의 문도 닫혔는데, 성경은 실패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지방에 퍼지니라…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무슨 이야기에요? 사람은 문을 닫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갇히지 않았다는 것이고, 사람은 전도자를 내쫓을 수 있어도, 복음의 능력까지 쫓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어요? 그런데 그 거부는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고, 이방인에게로, 더 넓은 세상으로 흘러갔습니다. 복음은요? 거절하면 떠나지만, 겸손히 받아들이는 심령에는 영생과 기쁨과 성령의 충만으로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요? 세상을 움직이고, 병든 자를 고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내 안에 머무를지는 오늘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너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다.” 이 사실이 있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에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누리는 주인공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