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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브로에서 일어난 일이 주는 의미”

(행 13:4-12)

 

지난주에 우리는 안디옥교회가 두 선교사,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한 이 일이 사도행전의 절정을 이루는 큰 의미의 사건이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큰 의미’란, 오순절 사건만큼이나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계 선교의 문을 여는 시작이 되었고,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전파가 되는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함께 본 말씀인 이 사도행전 13:4절부터는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일행은 실루기아로 가,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갔습니다. 그리고 구브로에서 살라미에 이른 후 바보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에 있는 총독 서기오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게 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면서 핵심은 바울이 총독 서기오 바울을 납득시킴으로 그가 예수를 믿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그였다는 것이고 이것을 방해하는 바예수라고 하는 이 엘루마를 성령께서 제거하셨다는 이야기, 서기오 바울이라는 총독과 바울 사이의 문제가 아닌 이 총독을 장악하고 있는 엘루마라는 박수와 바울의 문제, 성령과 이 엘루마의 싸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먼저 4-5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이동경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4-5절을 볼까요?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행 13:4-5)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타고 구브로에 갔다는것이고, 구브로에서 살라미에 이르러, 이 살라미에 있는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구브로가 어떤 곳이냐면 영어로 키프로스라고 하고 사이프러스라고 부르는 지중해에 있는 섬으로 바나바와 바울이 먼저 이곳으로 갔다는 경로를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사실 지중해는 매우 중요한 위치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와 로마가 이 지중해를 무대로 제국이 되었고,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이 지중해를 통해 넓혀갔으며, 그리고 이집트도 제국을 넓힌 곳이 바로 지중해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브로가 지중해에 있는 섬입니다. 소아시아의 남쪽 해상, 이스라엘의 서쪽에 있는 섬인데, 크기는 우리나라의 강원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고대 때부터 광물생산이 많다보니 유명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무역이 발달된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섬을 가로지르는 강이 있어 강 중심에 비옥한 땅이 형성되었고 농사와 기타 등등 곡물생산이 풍성하여 풍족한 도시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구브로에 여러 회당에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키프로스 남서쪽 끝자락 있는 바보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이 바보에 이르기까지 대략 열흘 동안에는 별 큰 문제가 벌어지지 않은 가운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구브로가 바나바의 고향이기에 그의 덕분에 큰 어려움 없었다는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바보에서 만난 한 유대인 마술사입니다. 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행 13:6) 이 유대인 마술사의 이름이 ‘바예수’라고 합니다. 여러분, ‘바’라는 의미는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은 ‘예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이름은 아람어식 이름인데, 헬라식 이름이 ‘엘루마’라고 8절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8절을 봅니다.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행 13:8)

 

여기에서 누가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짓 예언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키프로스 총독 서기오 바울이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힘을 썼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무엇이에요? 바꿔 말하면 이 바예수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지만 누가의 정보는 그가 ‘유대인 마술사’고 총독과 대칭적 구도로 등장시킴으로 하나님보다는 마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마술사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가 무슨 연유로 마술사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점성술 같은 행위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일들을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과거나 지금이나 별 반 차이가 없는 것이 있는데, 많은 성도들은 고나심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보다 당장 마술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도록 요구하게하고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당연이 사업도 잘되고, 자식들도 출세하고, 죽을병도 나을 것이라고 강조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보다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은사에 관심을 두게 하는 것이 교회 성장으로 이어지게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세미나도 엽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에요? 신앙을 기술의 문제로 보고 그렇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바예수도 이 부분에 대한 탁월한 능력이 있는 자인지 모릅니다. 총독의 백으로 세마ㅣ나도 열었느지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정치가인 서기오 바울을 종교적으로 보좌하는 예언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서 어용 신학자가 되어 마치 능력 있는 것처럼 꾸몄을 것입니다. 이 바에수를 누가가 한마디로 뭐라고 했습니까? ‘거짓 예언자’라고 하였습니다. 즉 거짓 예언을 통해 총독의 시종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왜? 서기오 바울이라는 총독은 이 바예수를 자신의 옆에 두었을까요? 서로 윈윈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자신을 종교적으로 합리화시켜주는 어용이 필요했기에 옆에 두고 정치와 종교 모두를 이끄면서 합리화했다는 것입니다. 바예수, 엘루마 또한 총독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어요. 우리는 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성도는요, 어용이 아니라 바른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봐야 합니다. 바른 안목을 가지고 기도하고 바른 안목을 가지고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비평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교회는 당연히 나라를 사랑하고 필요에 의하면 협조해야 하지만 나라가 잘못할 때는 지적하는 자리에 서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2차 대전 때, 독일교회에 어떤 모습이 있었는지 아세요? 독일교회는 '고백교회’와 ‘독일기독교인’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고백교회'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자리에 있었고, 독일기독교인은 대충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고백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이 미국을 볼 때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애국주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백인 우월주의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로 가서는 안 되는 기로에 있는데, 애국 정말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정부와 국민들에게 바른 예언을 하는 때가 되어 간다는 생각이 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총독 서기오 바울이 지혜로운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한마디로 총독은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7절입니다.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행 13:7) 그러니까 그가 바나바와 바울을 초청해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했다는 그의 이 영리함을 말한 것이고, 그가 상황 판단을 바로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안 이 마술사의 행동이 총독의 개종을 막으려고 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의 방해가 어떤 방해인지 모르지만 어쩌면 유치한 방법이었을 것이고, 비겁한 방법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냐면 사실 바울이 상대방을 독선적으로 공격하는 경우가 없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너무 심할 정도의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10-11절입니다.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행 13:10-11) 무슨 이야기에요? “기만과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악마의 자식아, 넌 나쁜 짓만 골라 하는 악당이구나. 너 언제까지 주님의 길을 훼방할 거니? 넌 이제 주님께서 친히 내리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네 눈이 멀어 한 동안 햇빛을 못 볼 것이다”는 이야기거든요. 이 말이 떨어지자 어떻게 되요? ‘안개와 어둠’이 내리 덮쳐 앞을 더듬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볼 때 엘루마의 방해는 얼마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결론으로 넘어가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거짓 예언자이며 유대인 마술사인 이 바예수가 성령에 가득 찬 바울에 의해 굴복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께서 싸운 것이고 성령께서 굴복시켰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이 사건들을 많이 만납니다. 솔직히 우리가 사는 오늘은 어떤 곳입니까? 마술과 속임수와 사이비 예언으로 무장한 이 세상입니다. 안 그래요? 특히 복음을 전할 때 방해하는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은 우리가 충분히 받아 들어야 하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현실 속에서도 존재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게,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강한 메시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분명한 부분은 서기오 바울이라는 총독이 지혜롭다고 해서 그가 정말로 스스로의 지혜나 스스로의 영적인 활동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솔직히 그는 엘루마의 포로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신자나 죄인을 예수 믿게 하는 것은 그를 납득시켜서 되는 것이 아닌 그를 붙잡고 있는 권세자의 격파입니다. 즉 구원은 어느 누가 대신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부모의 신앙이 깊기 때문에 내가 저절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서는 구원은 없다는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골로새서 1:13-14에서 일허게 밝힙니다. 들어보세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여러분, 여기에서 그가 누구에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즉 구속과 죄사함이 나의 회개와 나의 영접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 오직 그 분의 힘,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은 우리를 붙잡고 있는 흑암의 권세, 우리를 망하게 하는 죄의 권세,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사망의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격파시킴으로 우리가 거기서 놓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공로 때문이에요? 이것이 우리가 잘 나서 된 것이냐는 이야기에요? 아니잖아요? 공로도 잘나서도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요 1:12-13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이니라”(요 1:12-13)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했습니까? 그들이 잘나서요?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을 이방인이 보고 그들 또한 하나님을 믿게 하시려고 한 것이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믿을 때 축복이 임하는 것을 보여줌으로 이방인 또한 하나님을 잘 믿음으로 축복받는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요, 우리로 하여금 병 낫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창3장 15절 때문입니다. 구원을 얻어야 되는 대상인 이 영혼들이 지금 이 세력 아래 있는데 이것을 격파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 세력을 쫓아내어 우리가 자유케 하려고 오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드리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왜요? 새 술을 새 부대에 넣으시려고 오신 것이고,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이고 이 십자가가 흑암의 권세 아래 사망의 종노릇 하게 하고 있는 그 주인 된 권세자들을 깨트리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곧 우리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을 절실하게 안 사도 바울이 고전 2:1-2절에 이렇게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들어보세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이 구절은 사도바울이 자신의 연약함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자신도 복음을 전할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실력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이야기,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하시는 것을 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은 바울과 엘루마의 싸움도 아닌 성령께서 엘루마를 치신 것입니다. 그 증거가 어디에 나와요? 9절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행 13:9) 이 의미는 ‘주저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은바로  예수 충만함입니다. 결국 누가 본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손, 즉 성령께서 엘루마를 친 것이고 이것에 대한 결과가 10절입니다. 무엇이에요? 총독 서기오 바울을 붙잡고 있는 흑암의 권세를 깨뜨려 그 눈을 뜨게 한 것이고 흑암의 자리와 사망의 자리에서 건져낸 것,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엘루마가 눈이 보이지 않는 소경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고, 이 표현을 누가는 ‘안개와 어두움’이라는 점층적 표현으로 썼습니다. 완전히 실명하게 되어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이야기, 바울을 만나기 이전에는 자칭 선지자라 하여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갈 길을 지시해 주는 일을 했지만, 지금은 혼자서 걸을 수도 없어 인도자를 찾는 이 엘루마의 모습을 고발함으로 이것을 보고 총독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본문을 끝맺고 있습니다. 12절을 볼까요?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행 13:12)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의 올바른 진리가 전해지기까지 많은 사람들은 거짓된 미신과 마술에 취하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도하러 가지 않는다면 저들은 진리의 말씀을 알 수가 없었다는 말씀 또한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요, 진리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간청하는 자들 또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된 진리의 말씀을 기다리던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하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전하러 가면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한 종류는 마귀의 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하는 자들을 만나고요, 또 한 종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를 만납니다. 우리는 이것과 상관없이 전해야 합니다. 왜요?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았고 복음 전도 긴급하기에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뒤에 방해하는 존재가 무너지게 하는 분이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고 이것 또한 내가 잘나 나의 실력이 아닌 이 일 또한 성령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의미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이번 한주간도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성령 충만함의 자리에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요, 흑암의 권세 아래 사망의 종노릇하게 하는 그 주인 된 권세자가 무저니는 보는 우리 모두가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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