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9-21 주일설교
“어,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네”
(사도행전 10장 1~16절)
여러분, 여러분은 어렸을 때 번데기를 먹어보신 적이 있나요? 자라면서 먹어보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혐오감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서양인에게 있어서 ‘번데기’는 엄청난 혐오식품입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그들에게는 엄청나게 낯설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환상으로 보여준 것을 먹으라고 했을 때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베드로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규례라는 울타리가 무너지는 것이고, 단순한 먹거리 문제가 아닌 정체성의 울타리가 무너지는 사건입니다. 즉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이고, 하나님의 시선이 어느 특정한 집단에만 머문 것에서, 온 열방을 향한 시선이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은 지금도 크지만, 당시에는 더 엄청났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인은 이방인과 같은 식탁에 앉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도 “이방인은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 들어오면 죽음을 자초한다”라는 비문이 성전의 이방인 뜰 경계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허문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자유인과 노예, 남성과 여성,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높은 장벽이 복음으로 무너진 것이고,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는 어느 특정한 민족에게만 머문 하나님의 시선이 열방을 향하여 나간 하나님의 시선을 보여주는 사건의 본문입니다.
이 사건의 현장으로 함께 들어가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본문은 약간의 시차를 가지고 있는 환상입니다. 그것의 첫째가 고넬료에게 임한 환상이고, 두 번째는 베드로에게 보여준 환상입니다. 첫째로 고넬료에게 임한 환상입니다. 먼저 고넬료가 누구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1절입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로,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져 있으며, 헤롯 대왕이 로마 황제를 기리기 위해 건설한 곳입니다. 본래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헤롯이 거대한 인공 항구와 경기장, 극장, 수로 등을 세워 로마풍 도시로 탈바꿈시킨 곳입니다. 로마 총독부가 이 가이사랴에 있었고, 본디오 빌라도도 이곳에 거주하였습니다. 이 가이사랴에 사는 고넬료는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 그러니까 이달리야 군인들로 구성된 본 부대, 즉 정규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 로마에서 파견된 엘리트 군인 장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에 대해 놀라운 것을 또 알려줍니다. 2절입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아시다시피 고넬료는 그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지 삼고 있는 로마인입니다. 그것도 로마 군인 100명을 이끄는 백부장이었습니다. 보통 식민지에 파견된 군인들과 그들의 대장들은 피 지배인들에게 두려움의 존재들이라 당연히 고넬료도 무정하게 지배하는 지배층일 수 있는데,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경건은 “초월적이거나 위대한 대상 앞에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입니다. 이 말은 로마인들이기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을 섬긴 것이 기본인데 고넬료는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다른 로마 백부장들이 행하던 악한 행동들을 하지 않았고 강압과 탄압, 강탈과 착취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소개합니다. 유대인이 아닌데,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배운 사람도 아닌데, 하나님이 계심을 인식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함을 가지고 늘 하나님을 인식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원받은 사람처럼 보인 자가 바로 고넬료입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많은 선행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많은 선을 행함이 아닙니다. 그에게 놀랍게도 하나님의 환상이 임하죠. 3절입니다. “하루는 제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제9시는 지금의 오후 3시이고 유대인들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던 정규 기도 시간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유대 신앙의 경건한 습관을 따라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에요? 단순한 종교 행위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환상 중에 밝히 보매”, 분명하고 또렷하게 본 것입니다. 단순한 착각이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보여주신 분명한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하나님의 사자가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잘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왜? 불러요? 하나님께서 이방인인 고넬료도 그분의 구속사적 역사에 동참시키려 하신 것입니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전해준 말이 무엇입니까? 4절에,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경건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러나 이 두려움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심이었습니다. 그가 묻습니다.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이 질문은,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다고, 즉 하나님이 그의 경건 생활을 인정해 준 것입니다. 이어서 5~6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베드로를 청하라는 구체적인 지시, 만남으로 이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왜요? 경건하고 기도 생활을 하는 고넬료가 복음을 듣는 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베드로가 감당하도록 하셨고, 먼저 그를 당시 유대 사회에서 천대받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있게 함으로, 정결과 부정의 경계를 허무시는 준비 과정을 심으셨고, 그 집이 해변,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길이 열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환상 중에, 천사가 나타나 이러한 것들을 전하잖아요? 그러면 나타난 천사가 직접 복음을 전하면 좋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굳이 베드로를 청하게 해요? 이유도 알려주지 않으시고 청하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복음은, “사람을 통해” 전해지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메시지를 주실 수 있어요?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요? 교회와 성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롬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지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특권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요? 교회의 연합과 화해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만약에요? 천사가 고넬료에게 직접 복음을 전했다면, 고넬료는 곧바로 믿고 성령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넬료와 베드로, 곧 이방인과 유대인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려 하셨다는 것, 단순히 개인의 회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회복과 교회 공동체의 연합을 낳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자신을 깨뜨리기 위함도 있었어요. 사실 이 사건은 고넬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위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게 되고, 이 말씀을 들음으로 이방인에 대한 시각을 바꾸게 됩니다. 무엇이에요? 직접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 베드로의 편견을 깨뜨리고, 교회의 문을 열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복음 확장의 증거가 되게 하십니다. 사실 당시 초대 교회는요? 유대인 중심의 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이 구원받는 일은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직접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성령이 임하는 것을, 직접 목격함으로, 이 사실이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확실히 증언하는 자가 됩니다. 이 내용이요? 11장에 나옵니다. 무슨 이야기냐? 복음의 보편성이 공식적으로 교회에 선포되도록 하나님은 ‘베드로를 사용하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천사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고넬료입니다. 천사가 떠나자, 즉시 자기 종들을 보냅니다. 7~8절,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사자는 말씀을 전하고 떠났죠. 그리고 순종과 책임이 고넬료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래서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부릅니다. 신뢰할 만한 하인 둘과, 자신처럼 경건한 군인 한 사람을 불렀습니다. 중요한 일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천사의 명령을 듣고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고넬료의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순종은? ‘내일’이 아니라 ‘지금’ 하는 것이다”입니다. 여러분, 내일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지연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순종을 바로 ‘지금’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베드로에게 임한 환상입니다. 9~10절을 볼까요?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육 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묵고 있는 이 무두장이의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가는 사람들도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하고, 베드로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그때 시간이 제6시, 정오 12시이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무두장이 시몬의 집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라는 상황 설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단순한 상황 설명이 아니에요. 곧 일어날 사건과 연결되는 상황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먹을 것을 원하던 시간에 정결과 부정 음식의 환상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메시지가 열리는 상황입니다. 그것이 바로 11~12절입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하늘이 열렸어요? 각종 짐승을 담은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여 내려왔습니다. 이 말은 네모나고 평평한 그릇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짐승과 공중에 나는 짐승들이 가득했습니다. 무엇을 말하냐? 유대인 율법, 그러니까 레위기서 11장에 말씀하신 것과 신명기 14장에서 말씀하신 부정한 짐승들이 가득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절대로 먹을 수 없고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가득한 채 보자기에 담아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13절,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거늘” 환상을 본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이 “일어나 잡아먹어라”, 베드로의 반응이 14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강한 거부, 그것도 즉각적 거부를 합니다. 그 이유가 그에게 합당합니다. 왜냐?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 즉 레 11장에서 말씀하신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짐승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을 하나님께서 엄격히 구분했기에, 이 규례를 평생 지켜왔거든요? 그러니 “나는요? 결코, 먹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강력한 부정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새로운 명령을 거부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웃기는 베드로입니다. 왜냐? 자기는 지금 유대인들에게 가장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무두장이의 집에 있으면서 거부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함에도 두 번째 말씀하시죠? 15절,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그래? 참고할게!’가 아니라 당신의 뜻, 무엇이에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즉,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미 깨끗하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이 만든 기준과 전통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고,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짜샤? 무슨 말이 많아? 먹으라면 먹어! 야, 그것이 깨끗한지 속된지를 결정하는 게 너냐, 나냐? 나잖아? 내가 깨끗하다고 하는데, 네가 뭔데 안 된다고 해?” 이해되시죠? 그리고 16절입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거부가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일어났다고 하면서 오늘 본문은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담긴 내용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면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첫째로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생각을 주님, 예수님의 생각대로 고치고, 또 그 바꾼 생각과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예수님을 위해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시선이 어느 특정한 집단에서 열방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더 이상 특정한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죠? 하박국 2장 14절 말씀대로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이 일을 하고 계신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엇이에요?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보고,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고,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않고, 죄의 현실보다 은혜의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민족이 달라도 색깔이 달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하셨던 것을, 다르다고 속되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즉시 순종입니다. 다음 주에 나누겠지만, 베드로는요? 처음은 거부지만, 고넬료의 사람들을 따라가 그 집에 들어가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방인에게도 임하심을 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보자기 순간”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순종은요? 내일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어,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네” 하는 예기치 못한 순간을 만나게 할 때, 그것이 그동안 가졌던 기존의 틀을 깨야 하는 순간이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즉시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 보자기 안에는, 내가 꺼려왔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도 있을 것이고, 나의 틀을 깨뜨리는 새로운 부르심도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안 그래요? 그러나 그 순간,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는 이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열방을 향한 새 역사를 써 가는 것을, 보는 우리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